애새끼 키우다보면

[사소한 육아일기 4] - 아이와 사계절

고현준 2013. 9. 11. 12:08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후텁지근한 여름이 지나고

선득한 바람에서 가을을 느낀다.

 

네 살 혹은 다섯 살쯤? 유치원을 가지 않고 종일 집에서 뒹굴던 어느 가을날.

나는 마루에 앉아 가을은 참 쓸쓸한 계절이라고 생각했었다.

쓸쓸함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추상적이었던 마음이 그러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마음을 쓸고 간 공허함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 할 수 있다.

 

나는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봄 햇살을 가득 받으며 쑥을 캐고,

여름이면 파도가 발목에 자작거리는 바다에 들어가 조개를 줍고,

가을에 무르익은 보릿대를 따다 피리를 불고,

겨울엔... 그곳은 어쩌다 가끔 눈이 내렸다.

어쩌다 눈이 내린 그날에는 밥을 먹지 않고 뛰어 놀아도 엄마는 혼을 내지 않으셨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곳의 추억이 가슴 시리도록 특별하기에

나는 아들에게 내가 느꼈던 계절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첫눈이 내렸다.

“유준아 첫눈이야. 유준이에게 첫눈”

 

함박웃음을 짓던 아들은 뽀각 뽀각 소리를 내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쨍 하고 해가 뜨는 낮이면 서둘러 아이를 꼭꼭 싸매 밖으로 나갔다.

좀 더 가파른 언덕이 있는데 올 겨울엔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연둣빛 싹이 올라오고 눈부시게 꽃들을 피어내기 시작했다.

아들은 한창 돌맹이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저 꽃들은 네 무의식 속에 있을거야. 그렇지?

 

그리고 뒷산에 엄청난 변태가 있었는데,

수일 봄비가 내리더니 무서울 정도로 흰나비가 많아진 것이다.

꽃잎 같은 날개를 팔랑거리는 나비 떼는 마치 눈꽃이 내리는 것 같았다.

 

봄부터 시작된 아이의 돌맹이 사랑은 여름에도 계속 되었고,

우리집 거실에도 녹음이 드리워졌다.

훨씬 무성한 청녹색인데, 이번 여름은 유독 습해서 유리도 여름내 뿌연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난 여름비를 참 좋아했다.

집에 있는 모든 우산을 편 후 포개어 이글루 같은 집을 짓고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다가

비가 그치면 고인 웅덩이에서 첨벙거리고

진흙투성이가 된 후엔 고무 대아에 가득 찬 빗물에 씻으면 그만이었다.

시골 생활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나는 유준이와 비를 맞고 싶은 마음에 애가 달아서

서둘러 다이소에서 커다란 우비와 우산을 사고 하얀 고무신을 신겨 밖을 나갔더랬다.

그리고 아들은 온 동네를 돌고 돌다 ‘콸콸’ 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

유준이의 돌맹이 사랑이 사그라들자 새로이 등장한 것이 매미채였다.

뒷산으로 곤충을 잡겠다고 몰려다니는 형들을 부러워하자

할머니는 양파망과 옷걸이로 유준이표 매미채를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이 집 사람들의 소심함 때문에 다슬기 몇 마리 잡았다가 그마저 징그러워 방생했다지?

내년에는 좀 더 수확이 있길 기대해본다.

 

아. 이 가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푸른 잎들은 빨갛고 노랗게 색깔을 바꾸다 메마른 낙엽이 되어 나뒹굴겠지.

그러다 아들의 손길에 바스락 하는 비명을 지르며 가루가 되어 흩날리겠지.

밤나무의 밤들은 언제쯤 무르익어 떨어질까?

그러면 나는 손을 쓰지 않고 두 발로 알밤을 꺼내는 기술을 보여줄테야.

 

아이의 눈처럼 맑고 청명한 하늘.

쌀쌀하면서도 머리가 맑아지는 가을 공기는. 나를 환기 시킨다.